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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어 1탄] 두 시간 동안의 웃음이 아깝지 않은 이유

예매하고 나니 주위에서 "라이어 아직도 해?"라고들 했다. 두시간 내내 정신없이 웃다 왔다는 트위터리안들까지 기대풍선에 더 큰 바람을 불어넣었다. 그래서 15000회 넘게 장수한 이유가 있겠지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연극이 '코믹'이어봐야 얼마나 코믹이겠는가 했다. 소극장에 맞게 조금 과장된 몸개그나 말장난 정도겠지 했다. 그런데 이게 웬걸. 그런 추측은 레이쿠니 각본에 대한 모독이었다.  

장수연극 <라이어>의 매력, 하나하나 파헤쳐보자면.
(스포일러 다량 보유)

첫 번째 :::
레이쿠니의 탄탄한 각본 -하나의 상황, 일곱 명의 인물, 그리고 일곱 개의 상황

<라이어>가 장수할 수 있었던 첫 번째 이유는 완벽하게 짜여있는 각본의 탄탄함이다. 대학로 흥행보증수표라 불리는 레이쿠니(Ray Cooney)의 각본 실력은 대단했다. 탁월한 유머 감각으로 코믹연극 장르의 매력을 한껏 살리면서도, 관객들로 하여금 거짓말로 얽히고 설킨 '관계'에 주목하게 하는 데 성공한다. 어여쁜 아내를 두고도 두 집 살림을 해온 존 스미스가 불륜 사실을 숨기기 위해 거짓말의 방아쇠를 당긴 후, 차례차례 등장하는 일곱 명의 인물들은 꼬리에 꼬리를 무는 거짓말 속에서 하나의 상황을 제각각 서로 다른 일곱 개의 상황으로 이해한다. 그러므로 인물 A의 대사에서 인물 B의 대사로 넘어가는 짧은 시간 동안 관객들은 인물 A가 믿고 있는 상황과 인물 B가 알고 있는 사실 사이의 입장 차이를 빠르게 알아차려야 하는 난관(?)에 봉착하게 되는데, 이게 바로 이 연극의 묘미다. 분명 일곱 명의 인물이 하나의 상황을 두고 전부 다 다르게 이해하고 행동하는 데도 불구하고 꽤 자연스럽게 대화가 이어져나가고, 동시에 거짓말의 실타래는 점차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뒤엉키게 된다. 관객들은, 일곱 명의 인물들은 알지 못하는 이 복잡한 상황을 멀리서 다 꿰뚫어 보고 있다는 사실에 은근한 쾌감을 느끼며, 배꼽을 부여잡게 만드는 코믹함도 여기서 비롯된다. 무대 세트가 반으로 나뉘어져 객석에 앉아 두 집의 상황을 동시에 볼 수 있게 한 점도 보는 재미를 한층 업그레이드 시킨다. 

두 번째 :::
거짓말은 하되, 착하다(?) - 순진한 인물들의 매력

<라이어>에 등장하는 거짓말쟁이 존 스미스와 스탠리 가드너는 두 시간 동안 벌어지는 모든 거짓말의 핵심에 있다. 불륜 사실을 감추려는 존 스미스와, 그런 친구를 둔 죄로 울며불며 공범을 자처한 스탠리 가드너는 그러나 미워할 수 없을 만큼 안쓰럽다. 잘못을 알지만 모든 것을 밝히는 순간 상처받을 두 여인 사이에서 괴로워하는 존 스미스는 어쨌거나 메리와 바바라 두 여인 모두에게 필사적으로 최선(?)을 다한다. 불륜 사실이 탄로날까봐 전전긍긍, 벌벌 떨고 있는 친구의 가여운 모습을 외면하지 못한 스탠리 가드너는 꽃무늬 셔츠를 입고 백수 생활을 하던 따분한 일상이 순식간에 블록버스터급 으로 바뀌지만 "더 이상은 안돼!" 소리치면서도 결국 존과 끝까지 함께하는 의리(?)를 보여준다. 존은 메리와 바바라,  트로우튼 형사와 포터하우스 형사 사이를 오가며 두 시간 내내 방방 뛰고, 스탠리 가드너는 팔자에 없던 농장 주인과 동성애자 역할을 하며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인다. 스탠리와 함께 동성애자로 오해받으면서도 "그래, 나 두 집 살림했다, 어쩔래?"하지 못하는 존 스미스, "친구 때문이었어, 나하곤 아무 상관없는 일이야!" 하지 못하는 스탠리 가드너 둘 모두 겁 많고 순진하다. 나머지 다섯 인물들도 눈 앞에서 벌어지는 상황에 의심할 줄 모르는 순진무구한 인물들이다. 트로우튼 형사는 시종일관 존 스미스를 의심하는 듯하지만, 존이 모든 것이 거짓임을 폭로한 결정적인 순간에 진실조차 거짓으로 단정짓는 어리석은 추리력을 발휘한다. 더구나 메리와 바바라는 존의 계속되는 이상한 행동에도 불구하고 단 한 번도 그의 불륜을 의심하지 않는다. 또 포터하우스 형사 역시 형사답지 않은 순진한 표정으로 앞치마를 두른 채 '착한 요~정♪'을 외치면서 관객에게 큰 웃음을 선사하는가 하면, 이상한 이웃의 더 이상한 이웃 바비 프랭클린 역시 보고듣는 것을 그대로 믿어버리고는 특유의 여성스러운 목소리로 호들갑을 떤다. 어쩌면 인물들이 순진하지 않고서는 거짓말이 두 시간 동안 눈덩이처럼 불어날 수가 없어 그런 인물 설정이 당연한 것인 듯 보인다. 그러나 관객들로 하여금, 안쓰럽게 착한 거짓말쟁이 둘과 순진하면서 캐릭터 강한 다섯 명의 인물들 각각의 신선한 매력을 발견하게 하는 것 또한 연극 <라이어> 장수의 비결이라 할 수 있겠다. 

세 번째 ::: 
이게 최선입니까? 선의의 거짓말에도 책임은 따른다 

거짓말이 부풀려지는 정도는 무대위의 인물 수와 비례한다는 점도 흥미롭다. 삼자 대면, 사자 대면, 오자 대면의 상황 속에서 존과 스탠리는 이전에 만들어놓았던 거짓말이 탄로나지 않도록 마주한 인물들을 납득시키기 위해 계속해서 한 겹 한 겹 더 큰 포장을 한다. 속이기 위해 애쓰는 한 쪽과 잘도 속아 넘어가는 다른 쪽의 모습을 보면서 한참을 웃다보면, 관객의 머릿 속에는 슬슬 걱정 비슷한 불안감이 생긴다. 과연 이 연극의 결말이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한 것이다. 끊어내지 않고서는 절대 다시 풀어질 수 없을 것처럼 뒤엉킨 거짓말의 실타래를 어떤 식으로 해결할 것인지, 마무리 다운 마무리를 지을 수 있을 것인지 말이다. 극이 점점 절정으로 향해 가면서부터는 관객에게 일곱 명 인물 다 모아놓고 상황을 해결해보라고 해도 할 수 없겠다 싶을 정도로 거짓말이 꼬이고 꼬인다. 제대로 마무리를 짓지 않으면 '거짓말이 신기하게 얽혀서 웃기더라' 외에 별다른 의미가 없을지도 모르는 이 코믹연극은 그러나 탁월한 결말로 관객을 실망시키지 않는다. 트로우튼 형사와 포터하우스 형사 사이에서 존 스미스와 스탠리 가드너는 결국 모든 것이 거짓이었다며 나름대로 간단명료하게 설명해 낸다. 얼마간의 정적이 흐르고나서 트로우튼 형사는 오히려 그들의 진실폭로를 거짓으로 받아들이며 믿지 않는데,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음을 알아차린 존 스미스는 울상이 된 스탠리 가드너에게 키스하며 동성애자임을 다시 인정해버리고 만다. 결말 부분 트로우튼 형사의 반응은 관객에게 두 시간 남짓 웃음을 빵빵 터뜨린 이 연극이 관객에게 주려는 메시지를 곰곰히 생각해 보라는 과제를 남긴다. 거짓말이 거짓말을 낳아 돌이킬 수 없는 지점에 이르게 되면, 결국 잔뜩 늘어놓은 거짓말에 기대서 거짓말 인생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 나의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혹은 다른 이가 상처받지 않게 하기 위해 던진, 나름대로의 선의의 거짓말이라도 결국 진실을 왜곡한 거짓은 스스로를 다시 더 큰 위기로 몰아넣는다는 거다. 연극을 다 보고나서 집으로 가는 길, 의미없이 웃다가 끝난 연극이 아니라는 점을 발견하고 나면 실컷 웃고 난 뒤의 개운함과 함께 뿌듯함도 밀려온다. 

***
신촌 The Stage 12월 15일 목요일 8시 공연.

개인적으로 트로우튼 형사 역의 윤정훈 배우님과 포터하우스 형사 역의 신정만 배우님의 연기를 잊을 수가 없네요. 아직 안 보신 분들, 추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