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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vie

[러브픽션] 찌질하다 손가락질 마라, 우리는 누구나 찌질해진다.


 


(스포일러 주의) 

한 마디로, 결말만 해피하게 바꾼 알랭드보통의 연애론. 드 보통의 책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의 전계수식 영화화다. 흔하디 흔한, 그렇고 그런 로맨틱 코미디의 노선을 밟지 않으리라는 기대감을 딱 기대한 만큼 만족시켜준 영화다. (기대한 만큼의 만족은 물론 어려운 일이거니와, 기대 '이상'을 요구하지 않아도 될 만큼의 신선함을 충분히 느꼈으니, 이걸로 됐다.)

사랑과 연애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마르크스주의'까지 운운하던 소설 속 남자 주인공의 따분함도 어느정도 벗었고, 연인들의 대사도 꽤 흥미있게 채워넣었다. (어쨌거나 이 영화가 알랭드보통의 사랑론에서 '출발'한 것이지 소설의 영화화를 내걸고 나온 영화는 아닌 게 분명하니까.) 남녀탐구생활 연애편정도 되려나.가령, 채식주의자 구주월과 일주일에 서너 번은 고기를 씹어줘야 한다는 희진의 대화가 그렇다. 방금 전까지 동물원에서 귀여운 동물들을 구경하고나서 양 손으로 고기 뼈를 잡고 신나게 뜯어대는 희진을 마치 야만인 대하듯 쳐다보는 주월에게 희진은 따져 묻는다. 한두 번 정도는 데이트하면서 자기가 먹고 싶은 고기를 좀 먹으면 안되는거냐고. 탁구공처럼 받아치는 주월의 입에서 나온 말은 '너 오늘 왜 이렇게 까칠해? 그 날이야?'.희진이 정색하며 다시 받아친다.  정당한 이유로 합리적인 이야기를 하는 여자의 말에 마치 여자는 자궁에 뇌가 있다는 식의 말도 안되는 비아냥거림으로 되받아치는 남자들에 대해 분노한다고. 실망이라고. 그러고는 그 자리를 박차고 일어선다.
얼마나 많은 남자가 그녀의 입술에 놀아났는가, 내가 도대체 몇 번째인가 생각하는 주월의 그 찌질한 표정은 또 어찌 있으랴.

생각해보면 드 보통의 소설도, <러브 픽션>도 둘 다 '어느 찌질한 남자와 팜므파탈 그녀의 러브스토리'다. 전계수 감독이 직접 시나리오를 쓰며 상황 하나하나가 경험에서 우러나온 것이라고 했다는데, 어쩐지 그를 두고 찌질하다고 하는 것 같아 미안하긴 하지만 찌질한 걸 찌질하다고 하지 뭐 어쩌겠는가. 그렇다고 내가 몇 번째야? 하고 따져묻는 그는 한없이 찌질하고, 사진을 위해 스쿨버스 별명에도 아랑곳않는 희진을 예찬할 만 하다는 게 아니다. 그저 연애를 하면 우리가 다 찌질해지기 마련이라는 사실, 쿨하네 쿨하네 하면서도 절대 쿨할 수 없다는 사실. 더 많이 사랑한 결과로 더 많이 상처입은 이에게 언제나 그 대상은 팜므파탈, 옴므파탈일 수밖에 없다. 먹을 수 없는 포도를 신포도라고 말했다는  여우가 과연 나중에라도 그 포도가 진짜 신포도일지 아닐지 궁금해하지 않았다는 보장이 어디 있나.
이런 대화도 있다. 주월이 희진에게 묻는다. 너는 내가 왜 널 사랑하는지 안 궁금해? 희진이 답한다. 궁금하지만 안듣고 상상하는 게 좋다고. 사랑이 식은 후에 사랑받은 이유가 다 거짓이었음을 생각하며 괴로워하고 싶지 않다고. 영원히 사랑한다는 말에 목 메고 순정만화에 가슴떨려 하던 사춘기를 벗어나서, 아무리 열렬히 불타오르던 사랑이라도 분명 끝이 있음을 인정하고 시작해야 하는 '어른'들의 사랑에는 언제나 이별 후에 찾아올 자기연민에 대처해야 하는 씁쓸함이 있기 마련이다. 가장 행복한 순간에 가장 슬퍼질 순간까지 생각해야만 하는 영리함(?), 뭐 그런 거 말이다. 그러면서도 희진은 주월에게 남들 다 흔하게 듣는 '사랑해'란 말 말고 너와 나 사이에만 통하는 사랑의 고백을 들려달라 조르고, 결국 '방울방울해'하는 말에 씩 웃는다. 사실 이렇게 생각해보면 그토록 '쿨'해 보이는 희진도 '쿨'한 연애를 한다기보다는 쿨한 '자기방어'를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대세 하정우, 대세 공효진의 영화인 만큼 그들의 연기에 대한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다. 비스티보이즈, 추격자, 황해, 범죄와의 전쟁 등 주로 어둡고 무거운 캐릭터를 연기해 온 그가 로맨틱 코미디 속의 찌질한 소설가까지 완벽하게 소화해내니, 주변에서 '믿고보는 하정우'라는 별명을 붙혀 줄 만하다. 파스타, 최고의 사랑에서 공블리란 별명을 얻은 공효진이 침대에 누워 겨털을 마음껏(?) 보여주고 쿨해 보이는 이혼녀로의 완벽 변신에 성공했단 사실에도 박수를.주월의 옛여친 역할의 유인나, 맨날 라면만 먹는 백수 형 역할의 지진희, 무가지 '소문과 실토'에 목숨거는 출판사 사장 역할의 조희봉도 제 역할을 충분히 다 했다.

일전에 알랭드보통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리뷰도 남겼었던 것 같다. 충분히 신선하지만, 이런 류의 사랑론은 한 권 더 읽어보고 싶단 생각까진 들지 않는다고. 왜 내가 너를 사랑하는지 생각하는 순간부터 이미 사랑은 저 멀리 떠나고, 쓸데없는 사색만이 남아 스스로를 힘들게 할 뿐. 감독이 중간에 헤어질 수밖에 없을 만큼의 힘든 일을 겪고 다시 감동적으로 재회하며 끝나는 일반적인 로맨틱코미디의 해피엔딩을 선택한 건 아마도 '내 과거의 사랑은 모두 실패로 끝났지만 아직도 사랑은 유효하다'의 재강조이면서, 동시에 완벽한 애인은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가는' 거라는 메시지 같아서 조금은 간지럽기도 하다. 그러나  해피엔딩이 아니었다면, '수긍할 수밖에 없으면서도 어쩐지 인정하기는 싫은' 내용의 책을 또 한 번 읽은 것 같아 얼마나 씁쓸했을지 생각해보면 알라스카로 희진을 찾아 온 주월에게 고맙기까지 하다.

하정우의 찌질함과 그 찌질함을 한껏 부각시켜주는 공효진식 팜므파탈이 드 보통의 연애론을 훨씬 신선하게 만들어 준 데다가, 감독의 연출력 또한 개성있고 재치있다. 
남자 주인공의 직업을 크게 한 방 터뜨린 적 없는 소설가로 바꾸고, 구주월의 심리 표현을 위해 멀티맨(배우 이병준)과의 대화를 삽입하였다든지, 소설 속 클로이의 벌어진 앞니를  공블리 공효진의 '겨털'로 바꾸었다든지,  조선시대에나 나올 법한 문어체 연애편지로 관객을 한 번 빵 터뜨리고는 술자리에서 뜬금없이 등장하는 연극식 프로포즈로 또 한 번 케이오 펀치를 날렸다든지 하는 그런 점들은 전계수 감독의 차기작을 기대하게 만드는 이유다. 주월의 소설 속 대사를 더빙으로 처리했다든지, 인도영화에서나 볼 법한 방식으로 주인공의 말을 노래로 표현한 알라스카 뮤직비디오를 삽입했다든지 하는 아이디어는 도대체 어디서 나온 발상인지, 기법상으로도 풍요로워 즐겁다.

러브픽션
감독 전계수 (2011 / 한국)
출연 하정우,공효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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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소한 변명 : 칭찬 일색이거나 비판 일색인 나의 글을 항상 반성하지만, 마음에 들었던 영화는 마음껏  호들갑을, 안타까워 죽겠는 영화는 또 마음껏 그 이유를 투덜댈 수 있는 공간이 여기, 개인 블로그밖에 더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