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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vie

[이끼] 서로를 바위삼아 살아가려는 이끼들의 향연


(스포일러 다량 보유)
'이끼' 개봉 이후 거의 대부분의 평들이 '웹툰을 영화화'한 작품으로서의 '이끼'를 바라보며 변주라느니 변질이라느니 많은 논의가 쏟아져 나오고 있지만, 사실 웹툰을 접하지 않고 영화를 접한 관객의 입장으로서 해 볼 얘기도 있지 않을까 한다.

강우석과 웹툰 '이끼'의 만남은 썩어서 찌든 현실의 구석구석을 대중이 영화에 자연스럽게 몰입하여 발견하게끔 풀어내는 강우석 작품의 매력을 업그레이드 시킨 측면이 분명 있다.

축축하고 습한 바위에 기생하며 살아가는 이끼처럼 모든 등장인물들은 서로를 바위 삼아 살아가려는 이끼같은 인물들이다.


유목형(허준호 역)은 사람의 마음을 훔치는 종교 지도자로 등장하여 자못 진지하게 성경의 말씀을 전파하는 듯 하지만, 결국 그의 뜻과 다른 사람을 '악'으로 치부해 버리고 스스로 처단하려 하는 종교의 배타적이고 위선적인 면을 제대로 보여준다. 그가 전파하는 종교적 논리를 그대로 잘 따르고 순종하는 사람들이 있어야만 그것을 바위삼아 유목형이라는 이끼가 그 세력을 펼치는 거다.
천용덕(정재영 역)은 귀신같이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아 세뇌하는 데 능한 종교 지도자의 표면적 권위에 빌붙어 부를 축적해 권력을 잡고 스스로의 왕국을 건설하려다가 비극적인 최후를 맞는 인물로, 그 역시 유목형이라는 능력있는 종교지도자를 바위삼아 살아가려는 이끼 같은 인물이다. 그에게 유목형은 강력한 왕국을 건설하기 위해 세워 두어야 할 상징적 지도자였을 뿐이다.

이영지(유선 역) 역시 마찬가지다. 영화의 초반부 가장 의문스러운 인물이기도 한 그녀는 반전의 중심에 있다. 성적 유린을 당하며 상처 많은 삶을 살아가지만 그녀 역시 치욕스러운 과거를 보상해 줄 누군가를 찾기 위해 유목형의 죽음을 계기삼아 류해국(박해일 역)을 이용한다. 본인 뜻대로 천용덕의 왕국이 박살나자 결국 그의 왕국을 한꺼번에 집어 삼켜 새로운 왕국을 건설하고는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어 보인다. 유목형의 죽음과 천용덕과의 관계를 통해 얻은 얼마 간의 신임, 그 외 마을 사람들과의 친분을 유지하며 류해국을 본격적으로 이용하고 엄청난 이익을 챙긴 이영지야말로 어쩌면 가장 이끼같은 인물이다.
류해국과 박민욱(유준상 역) 역시 어떠한가. 통화만 하면 못 잡아먹어 안달이지만 류해국은 본인을 보호하며 아버지 유목형의 죽음과 관련된 사람들을 제대로 잡아들여줄 수 있는 국가 권력으로서의 박민욱을 필요로 했고, 박민욱은 이전의 앙심은 뒤로 한 채 한 건 제대로 해 먹고 지방으로 밀려난 검사 지위를 서울로 끌어올리고자 하는 속셈을 이룬 인물이다.
김덕천(유해진 역)과 전석만(김상호 역), 하성규(김준배 역)도 천용덕의 왕국이라는 바위가 없었다면 살아갈 수 없었던 이끼였을 뿐이다.

결국 바위와 이끼같은 인간관계가 세상의 모든 비극을 초래한다. 어쩌면 그 이끼같은 속성은 누구나 저도 모르게 심연에 깔려 있어 그것을 얼마만큼 드러내고 사느냐에 따라 그 운명이 달라지는 걸지도 모른다. 영화 후반부쯤 살인 도구를 쥔 자가 결국 죽게 된다는 이영지의 대사가 의미심장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겉으로 드러나 세상에 들켜 버린 스스로의 이끼 속성에 어쩔 줄 모르고 쥐게 된 살인 도구는 결국 그 자신을 향하게 되는 거다. 전석만이 그랬고, 하성규가 그랬고, 천용덕이 그랬던 것처럼.

<공공의 적>에서 그랬던 것처럼 전체적으로 스릴러라는 장르가 주는 매력을 힘껏 발휘하면서도 스릴러가 단순 스릴러로 끝나지 않고 탄탄한 구성에 꽤 의미있는 사회적 메시지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강우석과 웹툰 '이끼'가 서로 잘 맞아떨어졌을 수 있다.

사족을 몇 마디 붙히자면,
영화를 보고 나오는데 언뜻 '천용덕은 변희봉이 했어야 하지 않아?'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천용덕은 정재영이 연기할 수밖에 없었다.(라고 생각한다.) 변희봉이 했다면 정재영만큼 노인 분장을 힘써 해야 할 필요는 없었겠지만 젊은 형사 시절의 정재영을 변희봉이 어떻게 소화하겠나. 정재영의 노인 분장이 확실히 충격적이긴 하지만, 천용덕은 '노인'이라기보다 종교를 등에 없은 권력의 화신이다.

163분이라는 러닝타임이 과하지 않다.

이끼
감독 강우석 (2010 / 한국)
출연 정재영,박해일,유준상,유선,허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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